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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에 붙여진 절대적 시점

 

이선영(미술평론가)

 

최재훈의 [절대시점] 전은 갖가지 불확실성에 노출되어 때로는 죽음에 이르는 상처를 받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정확한 시점의 가능성을 묻는다. 어느 위치에서 볼 수 있는가는 생활 뿐 아니라 생존이라는 절대절명의 상황 속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문제이기에, 단순한 광학적 측면이 아닌 정치적 측면으로 다뤄질 수 밖에 없다. 이번 전시가 개인의 내밀한 상처부터 거시적인 시점으로 포착된 남북관계까지 이르는 이유다. 인간같이 시각 중심 동물에게 보는 것은 앎, 소유, 지배를 가능하게 하기에, 보는 자/보여지는 자 사이의 권력관계는 선명하다. 시각의 상호성은 민주적 소통을 위한 조건이지만, 이러한 권력관계 속에서 그 균형은 항상 시험에 붙여진다. 창이자 방패인 시스템은 ‘절대시점’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절대적 기준은 상대적일 수 밖에 없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절대시점은 ‘어느 시점에서 절대적으로 다가오는...’으로 해석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이 역사를 염두에 둘 정도로 장기적 비전 아래 살기는 힘들다. 기업이나 국가 같은 체계적 시스템은 이데올로기적 요구에 의해 한시적 시점을 절대화하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 작가가 직면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구성한 ‘절대시점’은 기대를 계속 배반한다. 최재훈은 자기 몸에 난 상처부터 시작하여, 시스템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괴물의 이미지, 남녀 사이부터 남북한의 관계에 이르는 상호 간의 인식 차이를 다양한 형식으로 보여준다. 영상, 위성사진, 인터뷰, 회화에 이르는 다양한 매체들은 매체 자체가 가질 수 있는 불투명성이 가세되면서 점입가경의 상황을 만든다. 정보혁명이 도래하기 이전까지 원근법은 수백년 간 시점에 관한 기준이 되어 주었다. 원근법은 이전의 절대시점이었다. 안 쉬르제는 [서양 연극의 무대장식 기술]에서 재현의 역사는 무대장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원근법적 무대는 고대인들을 위한 신비로운 환영의 장소 또는 중세 시대의 성경 말씀이 현현하는 장소가 될 것이었다.

즉 원근법은 사실주의와는 거리가 있고, 인간이 왕을 중심으로 왕에 의해서 이상적으로 정리된 세상에 대한 재현을 보는 장소였다. 안 쉬르제에 의하면 이탈리아식 극장의 형태는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의 사고, 즉 세상 속에 위치한 인간의 지위, 그리고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15세기부터 발전했다. 이때 관객은 움직이지 않고 원근법의 도움으로 구축된 한정되고 틀에 잡힌 정면의 이미지를 바라보게 돼있다. 원근법은 사람이 실제 현실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시각적 관점을 흉내내는 것이며, 이탈리아식 극장의 이런 기본 요소들은 지금도 여전히 극장에서, 그리고 특히 영화와 사진, 텔레비전, 또는 소위 가상 이미지에서 계속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환상이 일어날 수 있기 위해서 관객은 움직이지 않고 정해진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근법적 비전에는 이론적으로 하나의 이상적인 장소가 존재하며 그 자리가 바로 왕의 자리였다.

이상적인 장소가 바로 절대시점을 보장해 준 것이며,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중심주의적인 신의 자리 또한 이곳이다. 원근법으로 된 허구의 이상적 모델은 반영효과에 의해 왕에 의해 조직된 세상의 질서를 가리킨다. 그것은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와 언어의 증식에 의해 얻어지는 상징적 질서이다. 관객이 스스로를 위해 구축하는 것은 정신적이고 내적이고 영적인 이미지다. 신-인간의 자리를 보장해준 전통사회의 절대시점은 근대의 역동적인 시점에 의해 상대화된다. 원근법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절대시점이라는 것이 철저히 권력과 관련된 것임을 알려준다. 신의 시점을 공유하는 이는 특권적 인간이다. 이러한 인식이 휴머니즘에 대한 지속적인 회의를 낳았다. 하지만 휴머니즘의 관점을 결정적으로 뒤흔든 것은 정보혁명의 도래이다. 정보의 바다에서 인간적 척도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마크 포스터의 [뉴 미디어의 철학]에 의하면, 특히 복제와 속도의 측면이 그렇다.

전자미디어는 이전 시대 왕의 시점에 상응하는 지점을 확보하려 경쟁한다. 원근법적인 세계관은 더이상 불가능하지만, 여전히 강력한 중심이나 허브는 있기 마련이다. 최재훈이 절대시점이라는 다소간 신인동성동형론적인 개념을 현대미술에 도입한 것은 시차들을 현대의 미디어를 통해 보여주고자 함이다. 계몽주의가 추동하는 좀 더 개명된 사회가 미디어의 발달을 통해 도래했지만, 권력과 얽힐 수 밖에 없는 시점은 다시금 (플라톤이 비유한)동굴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 놓이게 한다. 이때는 보는 자 보다는 보이는 자의 상황이 더 문제시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791년 제러미 벤섬이 구상한 패놉티콘이다. 완전히 투명한 일망감시소로 설계된 감옥은 이후 다양한 차원으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이 건축의 모델에서 죄수는 자신이 보인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을 행위, 더 나아가서는 정신을 조절한다. 미란 보조비치는 [암흑지점-초기 근대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에서 판옵티콘은 ‘전례가 없는 정도로, 정신이 정신에 대해 권력을 획득하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평가한다.

완전히 투명하며 빛으로 가득한 판옵티콘 우주 속의 ‘암흑지점’에 모두를 보는 자의 시선이 있다고 가정된다. 판옵티콘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보는 자를 보지 못하는 채로 보여짐을 당한다. 우리 자신이 보지 못하는 자야 말로 더욱 더 우리를 보고 있을 것만 같으며, 우리가 보지 못하는 모든 것을 더욱더 볼 것만 같은 것이다.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은 완전히 투명한 일망 감시소는 허구가 현실에 미치는 효과를 보여준다. 판옵티콘은 현실 그자체가 이미 허구처럼 구조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델에서 감시자는 현존하지 않으면서도 편재한다. 부재하면서 편재하는 절대시점은 권력이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의 근본원리가 되었다. 미란 보조비치는 벤섬이 판옵티콘 안에 신을 창조함으로서 그는 스스로 암흑지점이라는 형식으로 하나의 허구를 창조했다고 평가한다. 인기 있는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절대 반지(The One Ring)’같이 만능의 힘을 가진 시점을 연상시키는 ‘절대시점’은 허구의 허구성과 현실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최재훈은 창조자로서의 비유를 독점했던 예술가의 권력을 이용하며 시스템의 일면성, 무경계성, 더 나아가 괴물적 측면을 표현한다. 이와 관련된 작품인 [sysmon] 시리즈는 비교적 간단한 방식을 통해 절대시점이라 할만한 것을 제시한다. [sysmon] 시리즈는 원래 아담한 크기(27x29x42cm)의 입체들이지만 원형은 전시에 나오지 않는다. 이 모호한 존재는 정체불명의 첨가물이 잔뜩 섞인 불량식품을 보는 것같은 느낌이다. 관객으로서는 무엇을 버무려서 그런 것이 나왔는지 알 길이 없다. 붉은색, 보라색, 금색 등 예쁜 색으로 칠해진 비정형적인 형태를 찍은 거대한 사진 작품으로만 전시된다. 실물보다 50배 정도 확대된 형상은 어지러운 외곽선뿐 아니라 숭숭 뚫린 구멍들로 경계가 모호한 존재를 거대한 미지의 형태로 다가오게 한다. 시스템과 몬스터를 결합한 단어 [sysmon]은 언뜻 반대되는 것이 한데 묶여있다. 시스템의 본질은 괴물적인 것을 배제하거나 제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괴물은 시스템과 달리 명확한 분류와 경계를 넘어서는 과도함의 결과물이다. 요컨대 시스템이 질서라면 괴물은 무질서의 상징이다. 하지만 ‘카오스모스’라는 말도 있듯이 질서는 무질서를 끌어안고 가야 한다. 물리학이나 수학에서 불확정성, 불완전성 등의 원리가 주목받는 것은 과학이 개방적 시스템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담는다. 한편 겉으로 무질서해 보이는 것도 질서가 있다는 카오스 이론이나 프랙털 이론도 무질서와 질서의 교차점을 말한다. 시스템이 자신이 다루기 힘든 것을 배제한 상태에서의 질서만을 현실이라고 볼 때 형식주의의 덫에 빠진다. 사회로 치면 관료주의의 병폐가 그렇다. 최재훈의 다른 작품에 나타나듯이 이러한 한정적 질서는 그 바깥의, 또는 경계의 존재에게 상처를 준다. 그 상처는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정체성이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계가 뚫린 상태인 구멍이 상처라면 이 구멍 많은 존재는 상처들의 집적체다.

괴물을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 전에 그자신이 상처의 산물이다. 시스템의 반듯한 측면이 진정한 질서의 면모가 아니라 환원과 폐쇄의 결과일 때 그자체가 괴물이 된다. 최재훈의 작품은 그러한 닫힌 시스템이 바깥의 괴물을 끊임없이 상정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이 괴물임을 말한다. 희생양이 필요한 인간사회의 규칙이 대표적이다. 괴물은 시스템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저주받은 존재지만, 동시에 신성한 존재다. 명확한 경계 없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최재훈의 sysmon들은 각각 단일한 색으로 덧입혀진 색만이 그 통일성을 보장한다. 얼룩이 입체화 된 듯한 기이한 존재들은 프라모델 중 군사적 전함, 탱크, 무기의 상징 등을 계속 녹여 붙인 산물이다. 작가는 시스템의 부품들을 모아 정체불명의 폐기물처럼 만들었다. 사진 작품에서 여러 폐기물을 녹여 만든 괴물의 원재료는 물론이거니와 원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그 복잡한 형태는 아무도 그것의 진면모를 알 수 없게 한다.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일 이 존재들은 누군가가 선택한 일면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최재훈은 척도와 기준의 모호함을 시스템에서 발견하며, 그 점이 시스템을 괴물로 만든다고 본다. 시스몬 시리즈는 임의적인 한 단편들이 얼기설기 엮여있는 것을 필연화하고 그 틀을 보편적 준거로 개체들을 재단하는 시스템의 민낯을 보여준다. [sysmon : follow the red rabbit]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여러 차원을 넘나드는 안내자인 토끼다. 하지만 관객에 따라서는 거기에서 다른 형태를 보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금색으로 칠해진 [sysmon : angel with torn wings]는 비너스 형태를 모티브로 했는데 불상같은 느낌도 준다. 금색으로 칠해진 천사 또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든다. 괴물의 부분으로 제시된 보라색 덩어리는 괴물 자체가 여기저기에서 떨어져 나온 단편들의 집합임을 알려준다. 작가는 작품 제목이나 색이 가지는 상징성, 가령 강렬하면서(빨강) 신비스럽고(보라) 귀한(금색) 색 같은 가이드 라인은 제시했다. 시스템이란 그 내부(본질)야 어떻든지 그럴듯한 외양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필요조건을 충족시킨다.

작품 [부력과 중력 사이 : 나의 상흔을 바라보라]는 상처라는 괴물적(비정형적이라는 의미에서) 존재를 바라볼 만한 형식으로 만든다. 일종의 순화, 또는 승화이다. 세로로 설치된 모니터 영상은 비정형적인 것을 대칭적 질서로 바꿔 관객 앞에 일으켜 세운다. 비정형적 괴물은 카페트 장식처럼 아름다워진다. 하지만 일렁이는 물과 보조를 맞춰 움직이는 세부들은 징그러운 느낌이며, 그것은 (영원히)아물지 않은 상처의 양상이다. 작가는 토템처럼도 보이는 이 대칭 형태에 아무리 빌어도 못 고치는 상처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상처를 기념비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은 노출증이 아니라, 치유를 위한 단계다. 하지만 치유에 요구되는 원상 복귀라는 기준은 없다. 조르주 깡길렘을 비롯한 철학자들은 정상/비정상의 구별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 제기를 해왔다. ‘부력과 중력 사이’에서 영원히 반복되는 상처는 상처를 상처로 인정하고 같이 가는 것이 치유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최재훈은 몸속 어딘가 깊이 감춰진 것을 일으켜 세우며, 호흡하는 듯한 리듬을 부여한다. 상처는 피부나 바로 그 아래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다. 상처에 대한 원형적 이미지는 작가의 몸 어딘가에 섬처럼 떠 있는 상처에서 온 것이다. 손을 댈수록 커지며 고쳐지지 않는 이 상처는 작품을 통해 타인의 상처와 소통하려 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 : 나의 상처는 비밀스럽지만 우리의 상처는 위대하다]는 이전의 발표작품에서 재난 시 유기체를 보호해주는 필름으로 덩어리를 만들어 사슴뿔 위에 추가 설치한 것이다. 바닥에 검은 흙을 깔아서 마치 거기에서 자라는 듯한 모습으로 업그레이드 됐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상처나 괴물에 대해 가지는 인정, 즉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있음 그 자체를 인정하는 태도와 연관지어 본다면, 인간과 늑대는 대조되기 보다는 수렴된다. 전설에 나오는 늑대인간은 반은 짐승이고 반은 인간인 괴물이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불완전한 존재는 그자체가 상처이자 자신의 상처를 전염시키는 존재다.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인간의 집단 무의식에 남아있는 잡종 괴물인 늑대인간은 원래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 자의 모습이라고 해석한다. 문명에도 야생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두 세계 모두에 거주하는 늑대인간의 인간도 짐승도 아닌 삶이 바로 추방된 자의 삶이다. 성악설로 알려진 홉스가 주권론을 정초하는 토대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언명에 나타나 있다. 조르조 아감벤에 의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한 야수와 야생의 생명이 아니라, 인간과 짐승 사이의 식별 불가능한 영역인 늑대인간, 즉 늑대로 변한 인간이자 인간으로 변한 늑대다, 한마디로 일종의 추방된 자(호모 사케르)이다. 조르조 아감벤에 의하면 홉스의 자연 상태란 국가의 법률과는 무관한 법 이전의 상태가 아니라, 그러한 법을 구축하고 그러한 법 속에 정주하는 예외이자 경계선을 말한다. 인간의 늑대화와 늑대의 인간화는 국가를 비롯한 시스템이 분해되는 예외적 상태에서는 언제든지 가능하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 경계선이 단순한 야생의 삶이나 사회적 삶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 혹은 신성한 생명으로서, 그것만이 주권의 유일한 전제라고 말한다. 늑대가 악역을 맡아야 할 이유는 없다. 반(反) 인간중심주의를 비롯한 다른 기준에 의하면, 모든 자연을 위협하고 있는 인간이 악하다. 특히 인간이 자기 이익을 위해 만든 시스템은 더 많은 인간들을 포함한 자연을 타자화 한다. 진정한 치유는 인간을 늑대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을 상대화해야 한다. 사슴뿔을 박아넣은 이 기념비 스타일의 작품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폭력적인 전유를 보여주는데, 작가는 이러한 상태를 치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번 전시에서 추가된 보호막 필름 덩어리는 인간이라는 시스템의 전횡에 맡겨진 타자들을 위한 기념비로 거듭나게 했다. [상처의 계곡]은 작년 개인전에 이어 서울 국제 대안영상예술 페스티벌(NeMaF)(평론상 수상)에서 공개되면서 많은 관객 참여를 끌어낸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상처 보호 필름 덩어리가 추가되었다. 그것은 수조 안에 던져진, 갖가지 사연들이 엉켜서 상처들이 엉겨붙은 것같은 부유물을 지긋이 눌러주는 역할도 한다. 관객은 옆에 마련된 작은 책상에서 자기만의 상처를 써서 구긴 후 수조에 던지면, 잉크가 번져서 독특한 문양으로 변하고, 완전히 퍼지기 전의 접혀진 종이 조각들을 촬영하여 마치 아련한 섬 풍경 보이게 만든 영상도 함께 나온다. 강한 조명으로 일출하듯이 아름다운 풍경은 각자의 상처들이 담긴 아픈 이야기들로 만들어졌다. 작가는 이 작업에 대해 ‘스스로의 아픈 기억과 마주하고 동시에 떠나보내기 위한 제의적 행위’라고 말한다. [사랑의 계곡]은 관객 참여를 통해 수집된 다양한 이별 이야기를 벽면에 붙이고 작가가 하나하나 지워주는 퍼포먼스이며, 영상으로도 담겨진다. 상처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고 한다. 기대만큼이나 실망도 큰 사랑의 상처는 내밀한 것이고 그만큼 소통하기도 치유하기도 힘들다.

[사랑의 벽 : 헤어진 여자친구 인터뷰]는 많은 사람들이 받는 상처의 원인이기도 한 남녀 간의 사랑을 해부대 위에 올려놓고 분석하는 듯한 작품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슨 기가 막힌 사연을 까발리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작가는 단지 녹화 장치를 이용하여 차이를 둔 반복을 실행했을 따름이다. 작품은 같은 영상을 시간 차를 두고 3개를 겹쳐서 플레이하여 화자의 말이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느낌으로 연출되었다. 등 돌려서 말하는 헤어진 여자 친구의 여러 추억담들은 별다른 이야기가 없음과 동시에, 말하는 사람에게도 듣는 사람에게도 낯설게 다가온다. 그게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기억인지 의아할 정도다. 순차적으로 울리는 말소리에 말하는 사람 자신도 의아해 한다. 이별은 서로에게 상처겠지만, 중차대한 공동의 기억은 불확실하다.

서로 간에 네가 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강한 의문이 제기된다. 같은 말을 여러 번 울리게 하는 미디어의 편집 방식에 의거한 경험과 기억의 재현은 그것의 동일성을 해체한다. 반복에 의해 해체되는 화자의 말소리는 미디어의 한계가 아니라 언어 자체의 한계로 다가온다. 물론 한계는 특징이기도 하다. 빈센트 라이치는 [해체비평이란 무엇인가]에서 언어는 언제나 ‘하나의 체계 내 다른 요소들과의 차이와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계층적 요소와 세력들의 무의식 체계’라는 소쉬르의 가정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강조점이 체계라기 보다는 차이다. 지시대상과 기호, 기표와 기의의 차이는 언어를 확실한 곳에 정박할 수 없는 표류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요컨대 구조주의라는 자못 엄격한 시스템은 해체를 준비한 것이다. 이후 후기 구조주의적 국면에서 차이는 더욱 전면화된다. 가장 유명한 것은 데리다의 차연이다. 여기에서 모든 본질주의적 가정은 흔적으로 해체되어 버린다.

캐서린 벨지는 후기 구조주의를 비평에 적용한 [비평적 실천]에서 ‘주체성의 가능성을 마련하는 것은 언어’(에밀 방브니스트)라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주체성에 대한 언어의 우위성은 라캉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주체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구성된 것’이다. ‘인간은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이 그를 인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라캉적 주체는 돌이킬 수 없는 분열에 기초하여 구성된다. 이러한 가설에 의하면 주체성은 (언어처럼)차이에 기초를 둔 것이고 상상적 합일은 영원히 회피적이다. 캐서린 벨지는 ‘주체성이란 것은 그 자체가 언어 속에서 구성된 것으로, 단지 다른 낱말들을 통해서만 낱말들을 설명하고 무한히 그렇게 계속하는 기성의 사전에 지나지 않는다’(바르트)고 인용하면서, 작가 또한 마찬가지라고 본다. 여기에서 ‘작가의 죽음’이라는 담론이 나왔다. 실제로 작가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유일무이한 원천으로서 낭만주의적 의미의 작가의 사라짐을 말한다.

캐서린 벨지에 의하면 작가가 실제로 하는 것은 (낭만주의적 작가상과는 달리)상호텍스트적인 단편을 조립함으로서 하나의 텍스트를 구성하는 일이다. 라캉적인 뜻에서의 주체와 같이 텍스트는 고정되지 않은 하나의 과정이다. [비평적 실천]에 의하면, 고전적 사실주의는 환상주의, 종결로 인도하는 서사 양식, 그리고 이야기의 진실을 확립하는 담론들의 위계질서로 규정된다. 고전적 사실주의의 개념적 틀을 제공하는 주체의 일관성과 연속성은 의문에 붙여진다. 주체나 ‘나’라는 주어의 사용에 의해 담론 속에 설정된다. 그러나 이 담론의 나는 항상 하나의 대역이라는 것이다. 최재훈의 작품에서 보이는 연인의 말더듬이 같은 방식은 왜곡이라기 보다는 말하는 인간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말하기는 필연적으로 배반을 준비한다. 언어 자체에 내장된 분열성은 언어를 매개로 한 지각과 기억 또한 분열시킨다. 말하는 주체는 분열의 조건을 피할 수 없다.

분열은 언어와 주체의 조건이며, 이는 사랑의 담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절대시점이 가지는 허구성이 그 허구성 때문에 현실성을 가진다는 함의를 지닌 미란 보조비치의 패놉티콘에 대한 사고는 사랑에도 적용된다. [암흑지점]은 서로를 보는 차이를 강조하는 라캉의 이론을 적용한다. 그에 의하면 라캉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자는 결여의 주체이며 욕망하는 주체이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반면에 사랑받는 자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신이 가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라캉에게 참된 의미에서의 사랑은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 안에서 보는 그 무엇과 사랑받는 자가 스스로를 지각하는 방식 간의 근본적인 불일치에서 생겨난다. 라캉의 말처럼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사랑받는 자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은 불일치에서 사랑의 드라마는 생겨난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상상하는 것의 불일치에 기반한 사랑, 요컨대 주체가 자신의 사랑의 원인을 알지 못한 채로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사랑의 맹목성’이 아닐까. 사랑은 자기애를 상대에 투사한 상상이기 십상이고 이러한 상상은 쉽게 깨지며, 상처 또한 필연적이다. 지난 시대의 총체성에 반발하는 현대철학은 불일치나 해체라는 기조가 깔려 있다. 주체성이나 주체성의 최고의 경험이라 칭송되는 사랑 또한 비관적 결말에 가깝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사랑의 담론을 의사소통이 아니라 주술로 생각한다. 사랑의 주체로서의 화자가 수신자와의 관계에서 계속 실종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사랑은 대상 없는 상태, 아니면 영원히 오지 않을 대상을 위한 것이 아닐까 의심한다. 그리고 서로 통할 수 없기 때문에 고독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 [사랑-]으로 시작되는 최재훈의 작품군들은 남녀 간의 사랑이 중심에 놓이는데, 그 사랑은 대개 서로 간의 오해에 의해 시작되고 이해에 의해 종말을 맞는 현실을 반영한다.

작가는 현실/비현실의 경계에 있는 여성의 나비 장식 핀을 강조함으로서 호접몽과도 같은 사랑 이야기를 전한다. 남녀 상호 간의 이해가 더 깊은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그런 일은 드물게 일어난다. 이러한 불일치는 상처의 근본적 치유 불가능성과도 연결된다. 최재훈의 전시는 자신의 상처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으로만 귀결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늘 상 개인적 차원의 메시지와 사회적 차원의 메시지가 함께 제시되며, 양자는 연동되고 있음을 표현한다. 작품 [각기풍경 오장경계(各其風景 奧藏境界)]는 ‘각각의 풍경 안에 수많은 경계가 있다는 의미’를 담는다. 그 말은 한국의 전통 의학용어이다. 한자는 다르지만 작가는 의학적 증상을 떠올리는 이 용어를 통해 선입견, 특히 남북 대치 상황과 관련되어 모든 자료 읽기가 이데올로기적 해석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비유한다. 영상은 위성에서 쳐다보듯 천천히 돌면서 5개의 장면이 10분씩 흘러나온다.

위성사진으로 본 북한의 풍경은 그 자체가 중립적 풍경은 아니다. 남측에서 보면 그것은 군사적 염탐이 된다. 북한 위성사진을 이용한 영상작업에 깔리는 소리는 실재 북한사람들에서 나오는 소리를 수집한 것이다. 백두산 천지 이미지가 나오는 장면에는 압록강에서 빨래하는 북한 사람의 방망이질 소리가 나오고, 북한의 산악지형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장면에는 북한 주민의 탈출 과정에 담겨진 발자국 소리와 압록강 철교의 안내 방송 사운드가 들린다. 위성사진으로 바라본 북한과 북한 사람들의 실제 생활 음은 서로 겉돈다. 하지만 ‘적대국’이라는 관점을 덧입혀 보면, 난데없이 피어오르는 연기는 조난 신호나 핵폭발 같은 기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작은 움직임도 염탐할 수 있는 항공사진이나 위성지도는 나름 ‘절대시점’을 제공해주는 듯하지만, 위성 영상의 시점 자체가 시간차를 둔 결과물이다. 밤하늘에 멀리 보이는 저 별빛이 이미 사라진 별의 이전 이미지일 수 있듯이 말이다.

작가는 여기에 영상과 무관한 소리를 덧입힘으로서 절대 시점의 간극을 더 벌려 나간다. 분단이라는 상처의 풍경 또한 말과 사물의 차이로 얼룩진다. 작품 [북한 구름들]은 구름이라는 중성적 대상에 북한이라는 접두어가 붙음으로서 생겨나는 불길한 기운을 활용한다. 작가는 위성사진에서. 구름이 있는 사진을 골라 그 위에다가 흰색으로 구름을 그렸다. 사진 위에다가 구름 모양대로 그린 6점의 작품들에서 누군가는 그 안에 방사능 물질이 가득 들어있는 핵실험의 증후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말과 사물 사이에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이 공간에서 작가는 거짓과 기만도 보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유희와 실험도 한다. 이 역설적 조건 속에서 상처의 치유는 영원히 유예되지만, 그것은 ‘출생 자체부터 각인된 트라우마’(프로이트)는 완치가 아니라 지속적인 재맥락화를 통해 치유에 근접해 나갈 뿐이다. 최재훈의 전시에서 ‘절대시점’은 없지만, 예술 또한 그것을 향한 지속적인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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